책소개
16세기는 통일국가의 형성 과정에서 다양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정치, 종교, 사회 등 여러 분야에서 논쟁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그 논쟁은 사회-정치사상의 발전에 유용하게 작용했다. 16세기 새로운 정치 구조의 형성은 다양한 사회계층의 관심을 자극했다. 사회의 관심은 국가의 정치 구조, 전제주의 권력의 성격과 특권, 통치 형태, 교회의 역할, 계층에 따른 법과 의무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변화된 러시아의 국제적 상황은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요구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사회사상과 정치사상의 발전을 자극했고, 문학 장르에도 비평이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그리하여 16세기 대다수 텍스트들은 정치성, 역사성, 종교성을 반영하고 있다. 순수 문학 텍스트라 할 수 있는 장르들에도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이데올로기가 나타났고, 이데올로기 논쟁은 계속되었다. 그리하여 비평가들은 16세기를 ‘논쟁 문학의 시대’라고 일컫기도 한다.
러시아 중세 이념의 초석이 되었던 <흰 두건 이야기>는 15세기 말경 노브고로드의 대주교 겐나디와 그의 동료이자 번역가(통역관)인 드미트리 게라시모프가 썼다. 이 이야기는 러시아 교회, 특히 노브고로드 교회의 주권을 보호할 목적으로 만들었으나, 이후 러시아정교회의 권위를 찬미하는 이념 서적으로 발전했다. 모스크바가 권력의 중심지로 성장한 16세기에는 이 작품을 근거로 ‘모스크바 제3로마’라는 이론까지 등장했다. 이 학설은 수도사 필로페이가 만든 것이다. 필로페이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예언서들에 따르면 모든 그리스도 왕국은 끝나고, 결국은 우리의 주권에 의한 하나의 국가로 연합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러시아다. 이전의 두 로마는 멸망했으나, 세 번째 로마는 영원할 것이며, 네 번째 로마는 존재하지도 않을 것이다.” 이 학설은 그리스인, 남슬라브인, 러시아인과 동유럽인을 의식하면서 모스크바가 올바른 동방정교 신앙의 유일하고도 충실한 수호자임을 규정한다.
16세기 논쟁 문학은 구(舊) 귀족과 떠오르는 신흥 귀족 사이의 정치적 투쟁으로 대표될 수 있다. 그리스인 막심은 전통 귀족의 이익을 대변했는데, 그의 상대는 신흥 귀족의 이상주의자인 다닐이었다. 막심은 진리와 정의를 기초로 한 통치와 왕의 도덕철학을 강조했다. 또, 그는 러시아 수도사들의 도덕적 타락을 비판했다. <막심 그렉>을 비롯한 막심의 작품은 수사법과 문법을 엄격히 준수했으며, 자신의 사상을 논리적이고도 논쟁적인 입장에서 발전시켜 나갔다.
<무롬 지방의 표트르와 페브로니야에 대한 이야기>는 작가이자 사회 평론가라 할 수 있는 예르몰라이-예라즘(에 의해 1540년대에 쓰였다. 그는 1540년대에 프스코프에서 성직자로 지내다가, 그다음 모스크바에 있는 스파사-나-보루라는 궁정 대사원의 사제장으로 있었다. 그리고 60년대에는 삭발 수도승이 되었다. 예르몰라이-예라즘의 작품에는 농민에 대한 작가의 애정, 그리고 귀족과 보야르에 대한 증오가 표현되어 있다. 작가의 높은 교양 수준을 증명해 주는 몇몇 작품들이 남아 있다.
이반 뇌제에게 보내는 안드레이 쿠릅스키 공후의 첫 번째 서한(총 다섯 통, 1564, 1566, 1577, 1578, 1579년)은 이반의 독재정치에 대한 강한 항의를 담고 있다. 이반 뇌제는 공후들이 실제로 자기 영지의 독립된 통치자들이었던 러시아의 낡은 봉건 체제를 전복하고자, 1550년대 말엽에 귀족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시작했다. 이때, 많은 귀족들이 교수대나 감옥에서 죽어 갔다. 탁월한 정치가요 군사 지도자인 쿠릅스키 공은 차르 이반 뇌제가 러시아 봉건 귀족에 대한 투쟁을 전개하기 전까지 그의 가까운 친구이자 조언자였다. 쿠릅스키는 당시 차르와 절연하고, 앞으로 그가 여생을 보내게 될 리투아니아로 피신했다. 그는 16세기 모스크바의 지식인 지도자였으며, 16세기 초엽에 러시아에 왔던 저명하고 박식한 학승 막심 트리볼리스(그리스인 막심이라고 불린)의 친구이자 제자였다. 안드레이 쿠릅스키는 리투아니아에 살면서 작가이자 번역가가 되었고, 러시아정교 문헌의 재정리 작업에 참여했다. 가장 잘 알려진 그의 작품은 차르의 전제정치와 귀족의 박해를 신랄하게 비난한, 이반 4세와 주고받은 서한이다.
이반 뇌제가 안드레이 쿠릅스키 공에게 보내는 서한(답장)은 러시아의 전제정치를 옹호하고 있다. 이반 뇌제는 자신만이 하느님에 대해 국가와 백성의 운명을 책임질 수 있다고 생각하고, 국가와 신민들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배타적인 권리를 요구했다. 이반 뇌제는 자신의 친척들에게 무자비했던 무서운 독재자였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훌륭한 통치자로서 러시아의 미래를 홀로 결정했다. 그는 귀족정치의 권력을 무력화함으로써, 중세 러시아의 봉건 체제를 종식시켰으며, 통일 러시아의 기초를 만들었다. 몽골 타타르에 대한 그의 승리는 우랄 지방과 북아시아 동쪽의 무한한 영토를 러시아에 제공했다. 그를 통해 향후 러시아의 확장을 향한 길을 닦았다. 표트르 대제 이전, 즉 150여 년 전에 이미 이반 4세는 유럽을 향한 창을 열려고 시도했으며, ‘리보니아 기사단’으로부터 발틱 해를 장악함으로써 러시아의 고립을 종식시키고자 했다. 이반 뇌제는 훌륭한 교육을 받지는 않았지만, 탁월한 논쟁가이자 작가였다. 그의 문체는 절제되지 않고 감정이 분출되어 나타나며, 자극적이고 무자비하다. 그는 적들을 모욕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리하초프는 16세기 중반의 문학을 ‘공식 문학’이라고 칭했다. 이는 당시에 생활 관습의 규범을 정해 주는 문헌들이 많이 나왔기 때문이다. ≪대미사 전집≫, ≪100항목 결의서≫, ≪도모스트로이≫ 등이 그러한 문헌들이다. ≪도모스트로이≫는 일상적 생활 규범과 올바른 종교적·윤리적 행실을 서술해 놓은 ‘가정 규범’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 교육, 가정생활 규범, 가정경제의 운용에 대한 실질적인 조언이 담겨 있다. 이 규범집은 중세의 사회사상을 담고 있는 교훈서로 16세기 공식 문학의 한 형식으로 나타난다.
≪도모스트로이≫의 첫 교정본은 16세기 중반에 나왔다. 이러한 고문헌은 주로 전래 문학, 번역 문학, 교훈 문학에서 찾아볼 수 있다. 현대적 관점에서 고전적인 ≪도모스트로이≫의 형태를 대표하는 두 번째 교정본은 모스크바에 있는 블라고베센스크 사원의 사제인 실베스트르라는 이름과 연관된다. 실베스트르의 교정본은 63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도모스트로이≫의 기본 문형에 실베스트르가 아들 안핌에게 보내는 서한이 포함되어 64장으로 되어 있다. 그는 삶에 대한 풍부한 경험으로 ≪도모스트로이≫의 내용을 요약하고 있다. 사실 ≪도모스트로이≫는 예술 작품으로 쓰인 글이 아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도모스트로이≫는 고대 러시아 문학의 문헌에 포함되었다. 이 작품은 시대적인 자료로서의 의미 외에도 현대 독자들에게 고대 러시아의 부유한 가정의 일상적인 삶을 명백하게 보여 준다. 그리고 행동 규범과 경제 운용에 대한 소개, 가정에서 사용하는 용기들에 대한 이야기 형식의 열거는 그 시대 사람들의 생활을 느끼게 해 준다.
200자평
이 책에는 16세기 러시아 문학작품인 총 5편의 글이 실렸다. 독자들은 이 작품들에 러시아 특유의 정치성, 역사성, 종교성이 적극 반영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막심 그렉>, <무롬 지방의 표트르와 페브로니야에 대한 이야기>는 전체 번역되었고, <흰 두건 이야기>는 요약본이며, <안드레이 쿠릅스키 공과 이반 뇌제의 왕복 서한>, <도모스트로이>는 발췌 번역되었다.
지은이
막심 그렉(l475~1556)은 16세기 초에 최고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다. 1492년 막심은 학업을 마치기 위해 이탈리아 피렌체로 갔다. 여기서 그는 당시의 휴머니스트들과 교제를 했는데, 특히 이탈리아의 저명한 출판인 알도 마누치(Aldo Manucci)와 가까워졌다. 사보나롤라(Savonarola, 1452~1498)의 설교는 그에게 가장 강한 인상을 주었다. 16세기 초에 그는 이탈리아를 떠나 그리스의 아토스 산에 위치한 바토페드(Vatopedi, Ватопед) 수도원에 정착했다. 이 시기에 막심은 신학 공부에 전력을 다했다. 1516년 모스크바의 대공 바실리 3세의 초청으로 막심은 시편 주석을 번역하기 위해 모스크바로 떠났다. 그 뒤 죽을 때까지 러시아에서 살았다. 막심의 주변에는 학식 있는 러시아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막심은 사원의 토지 소유에 반대하는 무소유파와 가깝게 지냈다. 소유파(공식교회)와 무소유파가 대립할 때, 막심은 이단으로 몰려 비난받았다. 1525년 종교회의에서 그를 볼로콜람스크(Волоколамск) 수도원에 유폐하기로 결정되었다. 1531년 종교회의에서는 새로운 이들이 막심을 비난했다. 그리하여 그는 트로이체-세르기예바(Троице-Сергиева) 대수도원으로 옮겨져 여생을 보내다 땅에 묻혔다. 막심의 저작은 다양한 분야에서 위대한 문학 업적으로 간주된다. 막심의 작품 가운데에는 설교문, 번역서, 서한, 철학과 신학 논문, 문법과 수사학에 대한 논문 등이 있는데, 운명에 대한 서한은 점성술이 널리 유행했던 16세기 당시 사회 분위기를 잘 반영하고 있다.
옮긴이
조주관은 오하이오 주립 대학(OSU) 대학원 슬라브어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박사 학위 논문은 <데르자빈의 시학에 나타난 시간 철학(Time Philosophy in Derzhavin’s Poetics)>이다. 한국러시아문학회 회장과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세계문학연구소 학술 위원을 지내고, 2000년 2월에는 러시아 정부로부터 푸시킨 메달을 받았다. 현재 연세대학교 노어노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대표 논문으로는 <데르자빈의 시학에 나타난 바로크적 세계관과 토포이 문제>(교과부장관상 수상)가 있고, 저서로 ≪러시아 시 강의≫, ≪러시아 문학의 하이퍼텍스트≫, ≪고대 러시아 문학의 시학≫(문광부 우수 학술 도서), ≪죄와 벌의 현대적 해석≫ 등이 있다. 번역서로는 ≪러시아 현대비평이론≫, ≪시의 이해와 분석≫, ≪러시아 고대문학 선집≫, ≪주인공 없는 서사시≫, ≪말로 표현한 사상은 거짓말이다≫, ≪자살하고픈 슬픔≫, ≪오늘은 불쾌한 날이다≫, ≪루슬란과 류드밀라≫, ≪뻬쩨르부르그 이야기≫, ≪검찰관≫, ≪타라스 불바≫, ≪보리스 고두노프/모차르트와 살리에리≫, ≪아흐마둘리나 시선≫, ≪보즈네센스키 시선≫, ≪오쿠자바의 노래시≫, ≪17세기 러시아 문학≫, ≪17세기 러시아 풍자문학≫ 등이 있다.
차례
해설
흰 두건 이야기
막심 그렉
무롬 지방의 표트르와 페브로니야에 대한 이야기
안드레이 쿠릅스키 공과 이반 뇌제의 왕복 서한
도모스트로이(가정 규범)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그리스도의 교리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다시 한 번 상기시킨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너와 네 아이들을 위해 이 글을 쓴다. 이 글을 유념하지 않고 가르침을 따르지 않으며, 이에 따라 생활하지 않고, 쓰여 있는 대로 행하지 않는다면, 두려운 심판의 날에 혹독한 보답을 받을 것이다. 나는 실책이나 죄악에 관여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내 죄가 아니다. 나는 질서 잡힌 생활을 찬양하고, 생각하고, 기도하고, 가르쳐 왔다. 그리하여 지금 이 글을 너희에게 전한다. 이 편지에서 나는 순수한 마음으로 간단한 교훈 및 교시에 대한 도움과 지식을 하느님에게 간구한다. 하느님이 교시해 주신다면, 하느님의 뜻은 실현될 것이다. 하느님과 성모님, 위대한 기적을 행하는 자들의 은총이 너희에게 깃들 것이다. 하느님이 너희 노력의 대가로 주신 집과 아이들, 그리고 너희의 이름은 지금부터 영원할 것이다. 모든 선행은 이루어질 것이며, 영원히 축복받으리라. 아멘.